우리가 어떤 사람이 크다고 할 때 무슨 기준으로 그 사람이 크다고 하는가?
몇가지 쉽게 떠오르는 기준들이 있다 덩치가 크다 높은 지위를 가졌다.
됨됨이가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 큰일을 해내거나 위대한 사람.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 왜 세례자 요한이 크다고 하시는가?
세례자 요한의 삶의 몇가지 흔적을 복음에서 되새김해보면 답변의 여지가 보인다.
첫째로 세례자 요한은 두려움이 없이 질문 하는 사람이었다 루카 7,19: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미 알고 있다고 이미 도달했다고 만족해하거나 이미 만들어진 답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큰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이다.
질문이라는 행위의 핵심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함보다는 아는 것에서 비롯되는,
더 새롭고 깊은 통찰로의 진입로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즉, 끊임없는 질문이
개인의 사고와 통찰의 깊이를 더한다. 우리의 결과중심의 사고방식은 ‘
문제의 해결능력’보다 ‘문제의 발견능력’의 가치를 무시해오지 않았는가?
좋은 질문속에서 이미 답이 있다. 평생 질문을 하는 삶을 살고 싶다.
둘째로 세상안에서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아는 사람: 요한 3,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마르코 1,7: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어려서 부터 처신(處身)을 잘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은
언제나 해당되는 진리의 말씀이다.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아는 사람은
남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서지 않는다. 오히려 남을 위한 공간을 만들수 있는 사람들이다.
신앙의 위치감각은 언제나 세례자 요한에게서 배우는 가르침이다.
셋째로 예수를 기억하게 하는 사람: 요한 3,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마닐라 대주교였던 한 추기경이 은퇴하였는데
지역 신문이 인터뷰를 했다. “추기경님, 은퇴를 하셨는데 누구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저를 어떻게 기억이요? … 아닙니다. 저는 온전히 잊혀지고 예수님만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사라지고 예수님이 드러나는 삶보다 더 훌륭한 삶은 없을 것이다.
신앙은 우리를 제 2의 세례자 요한의 삶으로 부르는지 모르겠다.
세례자 요한 처럼 큰 사람은 결코 하늘나라에 폭행을 (12) 가할 수 없다.
큰 사람은 규모의 의미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과 깊이의 이슈라는 것을 알겠다.
한해가 저물어간다.
대림절 남은 시간 또 새로 오는 한해 제 2의 세례자 요한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