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7-9) |
정신분석에서 하는 말입니다:
‘제대로 대면하거나 돌보지 않은 내적인 상처는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그것도 내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증상들로 나에게 파괴적으로 다가온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그 돌보지 않은 상처의 잔인한 파괴성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대면하고 있는 많은 병리 현상들을 볼 때 참 올바른 지적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만났을 때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뛰어난 사람들을 자기의 경쟁자로 보기 시작하면서 결코 삶의 긴장에서 풀려날 수 없는 상태에 빠집니다.
반대로 못나 보이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관용으로 이해하지 못할 때 사람들 사이에는 피곤한 갈등이 계속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상처는 긴장의 악순환으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오늘 복음은 자신이 대면하지 못한 삶의 상처 혹은 부풀려진 삶의 허상이 부메랑되어 자신의 삶을 지배당하고 있는 헤로데를 보여줍니다.
자신의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올바른 소리를 하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삶의 ‘어두움’을 헤로데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꿈으로써 대면해야했지만 그는 자신의 아내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더욱 깊게 어두움속에 계속 머물기를 선택합니다.
덮어둔 어두움은 그에게 또 다른 경쟁자 혹은 새로운 소리가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자 내면은 다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당황은 그가 걸어온 어느 지점에 존재했던 또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어두움을 은폐하고 왜곡함으로써 자신을 삶의 주체에서 소외시키고 습니다.
이제라도 자신의 어두움을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는 이 세상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헤로데는 바로 외면과 왜곡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사람들의 슬픈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나를 나답지 못하게 하는 모든 어두움을 지금 대면하고 어루만져 줄 때 더 온전한 부름받은 모습의 사람으로서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진ⓒ정강엽 Priverno, Ita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