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바티칸 뉴스] 식별에 대한 교리 교육 7. 식별의 요소: '영적 고독'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가 이전 교리 교육에서 살펴보았듯이 식별은 기본적으로 논리적인 절차가 아닙니다. 식별은 행동에 근거합니다. 행동에도 정서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식별의 대상인 첫 번째 감정의 양식, 곧 '영적 고독(desolazione;메마름, 황량함)'을 살펴봅시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요?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영적 고독'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영혼의 어두움과 어지러움고 비열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기울어짐, 그리고 희망도 사랑도 없이 영혼을 실망으로 밀어 넣는 여러 가지 흔들림과 유혹에서 오는 마음의 불안 따위를 말하는 것인데, 결국은 영혼이 게으르고 냉담하고 비통해져서 마치 조물주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317항).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모두가 이 같은 영적 고독에서 서둘러 헤어나려 한다면, 그 중요성을 놓치고 말 것입니다. 외로워하거나 슬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항상 즐겁고 유쾌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그러한 삶은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 무조건 우리에게 좋은 것도 아닙니다. 사실 악습을 지향하는 삶을 바꾸는 일은 '슬픔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자책의 상황'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리모르소(rimorso, 자책, 회한, 가책, 후회)"라는 말은 참 아름답습니다. 바로 '양심의 가책(il rimorso della coscienza)'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양심이 찔리고, 평온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탈리아 소설가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약혼자들>에서 양심의 가책을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로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고 무명인 사이의 유명한 대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명인은 고통스러운 밤을 지새운 뒤 처참한 몰골로 추기경을 만나게 되는데, 추기경의 말에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페데리코 추기경은 더욱 다정하게 말했다. '무엇입니까? 제게 전할 좋을 소식이 무엇입니까?' '좋은 소식이라뇨, 제가요? 제 마음은 지옥과 같습니다. 추기경님께 좋은 소식을 전하다뇨? 만약 아신다면, 추기경님이 말씀해 주시죠. 나 같은 놈에게 바랄 좋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추기경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당신을 그분의 것으로 삼으려 하십니다.'"(<약혼자들>, 23장) 하느님께서 마음을 어루만지시니 마음 안으로 무엇인가가 들어옵니다. 무엇인가에 대한 슬픔이나 가책입니다. 이는 새로운 길을 떠나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마음속에서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지 잘 알아차릴 줄 압니다. '슬픔을 읽어낼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악마에게서 오는 것인지 식별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슬픔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을 통해 무엇인가를 읽어낼 줄 아나요? 오늘의 이 슬픔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요? 우리 시대에서 슬픔은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경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덧없음과 도피를 허용하지 않는 보다 풍요롭고 비옥한 전망을 체험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슬픔을 '영혼의 고통'으로 정의합니다. 신체의 신경처럼, 그것은 우리의 주의를 가능한 위험이나 예상치 못한 선에 직면하도록 해줍니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 <신학대전>, I-II, q.36, a.1 참조). 이러한 까닭에 슬픔은 우리의 건강에 없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이러한 감정을 느끼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훨씬 더 심각하고 위험합니다. 때때로 슬픔은 신호등 역할을 합니다. "멈추세요, 멈추세요! 빨간불입니다. 멈추세요." 반면, 선을 행하려는 열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악마로부터 오는 슬픔은 유혹자가 우리를 낙담시키려고 하는 '장애물'에 불과합니다. 이 경우, 유혹자가 제시한 것과 정확히 상반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며, 자신이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을 계속하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영신수련>, 318항 참조). 일, 공부, 기도, 책임을 맡은 소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지루함이나 슬픔을 느끼자마자 그러한 것들을 그만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또한 영성생활에 있어 공통적인 경험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선으로 가는 길이 좁고 험난하며, 자기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자기 정복이 필요하다는 점을 떠올려 줍니다. 기도를 시작하거나 선한 일에 헌신할 때, 이상하게도 바로 그 순간 급하게 해야 할 일이 떠올라 기도도 못하고 선한 일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경험이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영적 고독'에 휘둘리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아니요, 싫어요. 그것은 너무 지루해요.(...)" 조심하십시오. 불행하게도 어떤 이들은 '영적 고독'에 휘둘리는 바람에 먼저 멈춰 서서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살펴보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영성 지도자의 도움 없이 그냥 기도 생활을 포기해 버리거나, 혼인 생활이나 수도 생활에 대한 선택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현명한 규범은 "고독할 때는 전에 결정한 것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영신수련>, 319항 참조)고 말합니다. 우리가 택한 선이나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은 순간의 기분이 아니라 그 이후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확고한 결의의 태도로 유혹을 물리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마태 3,14-15; 4,1-11; 16,21-23 참조). 시련이 사방에서 들이닥치지만, 그분은 언제난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확고히 결심하시고 그 누구도 그분의 길을 막거나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영성생활에서 시련은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집회 2,1). 여러분이 올바른 길을 가고자 한다면 스스로 대비하십시오. 장애물이 있을 것이고, 유혹이 있을 것이며, 슬픔의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교수가 학생을 평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학생이 해당 과목의 핵심을 잘 알고 있으면 교수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그 학생의 시험 합격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학생은 교수의 시험에 통과해야 합니다. 외로움과 영적 메마름을 열린 마음과 깨달음으로 헤쳐 나가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인간적, 영적 측명에서 강인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시련도 우리의 능력 밖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십니다. 그러니 시련을 피하지 마십시오. 그 시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십시오. 나는 왜 슬퍼하는가? 이 순간 내 마음이 메마르고 황폐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영혼이 메마르고 황폐하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오로 사도는 아무도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우리가 그분과 함께하면 모든 유혹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3 참조). 만일 오늘 이겨내지 못한다면, 다시 일어나 걸으면 됩니다. 우리는 내일 이겨낼 것입니다. 단, 우리가 죽은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내 영혼이 메마르고 황폐해진 순간에 패배한 채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항상 길을 떠나는 이 영적 여정에 주님께서 복을 내리시기를 빕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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