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2022년 12월 21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식별에 대한 교리 교육을 이어나갔다. 교황은 우리가 종종 왜곡된 생각으로 하느님을 바라보지만 그분의 참모습은 이와 다르다고 말했다. “하느님 말씀은 사려 깊고 정중합니다. (…) 하느님의 말씀은 겸손합니다. 그래서 온유합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식별에 대한 교리 교육 1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도 식별에 대한 교리 교육을 이어갑시다. 이 여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식별에 대한 교리 교육 여정을 따라오신 분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식별하는 것이 참 복잡하구나!” 사실 인생이 참 복잡합니다. 인생은 그 자체로 복잡하기는 하지만, 인생을 제대로 읽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 가치를 떨어뜨리면서 우리 인생을 허비할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의 첫 만남에서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매일 언제나 우리가 먹고, 읽고, 일하고, 관계를 맺는 모든 측면에서 식별을 행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인생은 항상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결국 인생이 우리를 대신해 선택하고 결국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런데 식별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어떤 측면에서는 그동안의 교리 교육 여정을 통해 그러한 식별 행위를 다루긴 했습니다만, 이와 관련해 오늘은 우리 영성생활에서 필수적인 식별훈련을 증진할 수 있는 ‘몇 가지 도움’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한다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빼놓을 수 없는 도움은 우리 삶을 ‘하느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읽어내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법을 배우고, 우리 관심을 끄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다른 목소리를 하느님의 목소리와 구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음성이 고요함과 집중,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진다고 지적합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체험을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바위를 부수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고, 불 속이나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으며, 대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1열왕 19,11-12 참조). 이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매우 아름다운 이미지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사려 깊고 정중합니다. 감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겸손합니다. 그래서 온유합니다. 오직 평화 속에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 깊이 들어가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 두신 진정한 열망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 종일 이런저런 많은 일로 바쁘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의 평화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 부탁입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평온을 유지하며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자기 자신 안으로 말입니다. 2분만 멈춰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살펴 보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그렇게 한 번 해 봅시다.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요한 순간에 우리는 즉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 이것을 보아라. 저것을 보아라. 네가 하고 있는 일은 좋구나. (…)”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때 하느님의 목소리가 즉시 들려옵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이유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하느님 말씀은 단순히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는 현존입니다. 위로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며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빛과 힘과 위안과 열정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짧은 대목이라도, 한 대목 혹은 두 대목이라도 읽으십시오. 성경을 읽는 것은 즉시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짤막한 전보를 보내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약간 – 과장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과 같습니다. 위대한 성인 겸 목자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이를 잘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성경을 읽을 때, 하느님께서 돌아오셔서 지상 낙원을 거니십니다”(『서간집』, 49,3). 하느님께서 거닐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엽니다. 매우 흥미로운 표현이죠. (…)
성경, 하느님 말씀, 복음과의 이러한 정서적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님과의 정서적 관계’를 맺게 합니다. 이를 겁내지 마십시오! 마음이 마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식별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도움입니다.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도움입니다. 우리는 종종 왜곡된 생각으로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무뚝뚝하고 가혹한 재판관, 우리 잘못을 언제라도 잡아낼 준비가 되어있는 분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만나시려고 기꺼이 당신을 희생하시는 연민과 온유함으로 충만한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언젠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어머니인지 할머니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보렴. 그분께서 너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일러주실 거야.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보렴.” 훌륭한 조언입니다. 한 번은 또 해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7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루한 성모성지로 가는 젊은이 성지순례에 함께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하루 종일 걸어서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밤에 평소대로 고해성사를 베풀었습니다. 온통 문신으로 뒤덮인 22세쯤으로 보이는 청년이 고해성사를 하러 저에게 왔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오, 세상에. 이 친구는 뭐지?”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왔습니다. 어머니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 ‘성모님께 가거라. 성지순례를 가라. 성모님께서 너에게 말씀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여기 왔습니다. 여기서 저는 성경을 접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북받쳤습니다. 이런저런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저는 이러한 경우를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무너뜨리길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나날이 더 강해지고 더 나아지길 원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 앞에 머무르는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평화를 느끼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은 아무도 두렵게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나약함의 모습이자 우리를 위해 어떤 시련도 감당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성인들은 항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끌렸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악에 압도당하지 않으면서 악에 맞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거기에는 판단이나 심지어 체념도 없습니다. 가장 큰 빛, 부활의 빛이 가로지르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그 어떤 방해나 장애, 실패도 막을 수 없는 그 끔찍한 행동들 안에서 더 큰 계획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다른 면을 보게 합니다. 곧, 여기에 십자가가 있고 그것이 끔찍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것, 바로 희망과 부활이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위해 모든 문을 열어줍니다. 왜냐하면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문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집어듭시다. 성경을 항상 가지고 다닙시다. 하루에 5분 정도 시간을 내어 읽읍시다. 더 많은 시간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주머니 크기의 복음서를 가방에 넣고 다니십시오. 여행할 때 가지고 다니면서 하루에 조금씩 읽어 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마음에 다가오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하느님의 말씀에 가까워진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신부님, 하지만 저는 성인들의 삶을 읽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좋고 말고요.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복음서를 집어들고 읽으십시오. 하루에 1분이라도 읽어보십시오.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을 나날이 자라나는 우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친구가 되길 원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과의 우정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역량이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커다란 은사 중 하나인 ‘공경(la pietà)’입니다. 공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아버지다움을 인식하게 해 줍니다. 우리에게는 다정다감하신 아버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항상 우리를 사랑하셨던 아버지가 계십니다. 이를 체험할 때 우리의 마음은 녹아내립니다. 의심과 두려움, 가치 없다고 느껴지는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주님과의 이 만남의 사랑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또 다른 큰 도움, 곧 ‘성령의 은사’를 생각나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가르치시며, 우리가 읽는 하느님 말씀에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시며, 닫혀 있는 것처럼 보였던 문을 열어 주시고, 어둠과 혼돈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생에 길을 가리켜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성령께 기도하나요?”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위대한 분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빼먹습니다! 한 번은 어린이들에게 교리 교육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성령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 있나요?” 한 어린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성령이 누구인지 알아요.” – “그래, 성령이 누구니?” 그 아이는 저에게 “파랄리티코(paralitico, 중풍병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그 어린이는 “파라클리토(Paraclito, 위로자 성령)”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누구냐고 묻자 “파랄리티코”라고 대답한 것 같습니다. 이 일이 저에게 얼마나 많은 생각을 남겼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령은 분명 계시지만 중요하지 않은 분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안으로 들어 오시도록 하십시오. 성부와 대화하듯, 성자와 대화하듯, 성령과 대화하십시오. 성령은 중풍병자처럼 꼼짝도 못하는 “파랄리티코”가 아닙니다! 성령 안에 교회의 힘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성령은 움직이는 식별력이자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그분은 성부께서 성령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보장하시는 은사이자 가장 큰 선물입니다(루카 11,13 참조). 예수님께서 성령을 어떻게 부르셨나요? “은사(dono, 선물)”라고 부르십니다. “여기 예루살렘에 남아 하느님의 은사를 기다려라.” 바로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과 친교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 삶은 참 아름답습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변화시키시고 자라나게 하십니다.
성무일도 기도는 다음과 같은 시작기도로 하루의 주요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느님, 날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나를 도우소서.” “주님,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혼자 앞으로 갈 수 없고, 혼자 사랑할 수도 혼자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 구원을 청하는 이 기도는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억누를 수 없는 청원입니다. 식별의 목표는 주님께서 내 삶에서 이루시는 구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만일 내가 고군분투하고 있다면 그것은 모험을 감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떠올려 줍니다.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아, 신부님. 제가 정말 나쁜 짓을 저질렀어요. 고해성사를 하러 가야겠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 네, 나쁜 짓을 저질렀나요?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성령께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못된 짓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성령과의 대화를 빼먹지 마십시오. “신부님, 저는 대죄를 지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성령께 말씀드리면 여러분이 용서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령과의 대화를 절대 멈추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러한 도움으로 우리는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용기 내어 기쁘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