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지구에 대한 “탐욕” 중 하나인 식탐을 특별히 조명하면서, 이것이 “모든 이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악이라고 설명했다. 교황은 폭식증, 거식증, 비만 등 음식과 건강하지 못한 관계, 말하자면 정신과 영혼에 관한 병에 대해 성찰했다.
교리 교육: 악덕과 미덕 3. 식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악덕과 미덕에 관한 교리 교육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식탐’이라는 악덕에 초점을 맞춰보겠습니다.
복음은 이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나요? 예수님을 살펴봅시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그분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은 ‘인간의 기쁨에 대한 그분의 호감’을 드러냅니다. 그분은 잔치가 잘 끝나도록 배려하시고, 신혼부부에게 아주 좋은 포도주를 많이 마련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세례자 요한과는 매우 다른 예언자로 묘사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얻은 것을 먹으며 금욕하는 인물로 기억되는 반면, 예수님은 우리가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시아로 기억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다정하실 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모든 이와 친교를 나누고 또 가까이 있으려는 열망을 보여주기에 몇몇 사람들에게는 스캔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지켜야 할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율법에 대한 그분의 완전한 복종을 우리에게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당신 제자들을 이해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다윗 왕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을 떠올리시면서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마르 2,23-26 참조).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는 새로운 원칙을 확립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은 신랑을 빼앗길 날에 단식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면 슬퍼할 수 없지만, 그분의 수난의 시간이 되면 우리는 슬퍼하며 단식할 것입니다(마르 2,18-20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의 신랑이신 당신과 함께 있을 때 기뻐하길 원하시지만, 우리가 당신의 수난이기도 한 작은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수난에도 동참하길 원하십니다.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예수님께서 유다교 율법에 따른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별을 없애셨다는 점입니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마르 7,19)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교는 부정한 음식에 대해 비중 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면적인 것에 주목합니다. 말하자면 음식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음식과 맺는 관계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음식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은 음식 그 자체가 아니라 음식과 우리가 맺는 관계에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음식과 무질서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우리는 배불리 먹으려 하지만 결코 만족을 모른 채 서둘러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음식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음식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을 먹는 방식과 관련하여 확립하신 이 평온한 관계는 특히 많은 ‘불균형’과 많은 병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소위 웰빙 사회에서 재발견되고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적게 먹습니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거식증, 과식, 비만과 같은 섭식장애가 확산되고, 의학과 심리학은 우리가 음식과 맺는 나쁜 관계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음식과의 잘못된 관계는 이 모든 질환의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질환들은 대부분 정신과 영의 고통과 관련이 있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병입니다. 음식을 먹는 방식은 균형이나 절제 성향,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나 오만한 자율권 내세우기, 궁핍한 이들과 음식을 나눌 줄 아는 이들의 공감이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모든 것을 비축하는 이들의 이기심과 같은 내면의 무엇을 드러냅니다. 이 질문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먹나요?’ 여러분이 어떻게 먹는지 말해주면 여러분이 어떤 영혼의 소유자인지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방식에서 우리의 내면, 습관, 심리적 태도가 드러납니다.
고대 교부들은 식탐이라는 악덕을 “위장의 어리석음”으로 번역할 수 있는 “탐식”(gastrimargia)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식탐은 “위장의 어리석음”입니다.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식탐은 식욕과 같은 인간의 필수적인 욕구 중 하나인 먹는 것에 집착하는 악덕입니다.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식탐은 아마도 ‘지구를 죽이는’ 가장 위험한 악덕일 것입니다. 케이크 한 조각의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들의 죄는 모든 것을 고려할 때 큰 피해를 입히지는 않겠지만,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가 지구의 재화를 약탈해온 탐욕이 모든 이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달려들어 모든 것의 주인이 되려고 했지만, 그 모든 것은 우리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돌보도록 맡겨진 것입니다. 여기에 큰 죄, 이를테면 ‘위장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이름을 버리고 “소비자”라는 또 다른 이름을 취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소비자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말입니다. 우리는 감사할 줄 알고 땅을 현명하게 사용할 줄 아는 “성찬의” 사람이 되도록 창조되었지만, 그 대신 포식자로 변해가고 있으며 이제 우리는 이러한 형태의 “식탐”이 이 세상에 많은 해를 끼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식탐이 우리 삶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우리가 절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구합시다.
번역 김호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