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 소식

제목교리교육: 악습과 덕 13. 인내2024-06-09 03:09
카테고리교황 프란치스코
작성자

[출처: 바티칸 뉴스]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필수 비타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3월 27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감수하시는 사랑을 뿌리로 삼는 덕인 ‘인내’를 설명했다. 교황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하느님을 위해 참는 것이라면 하느님 대전에는 공로가 되지 않을 것이 없다고 말했다.

교리 교육: 악습과 덕 13. 인내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일반알현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우천으로 인해 이곳 바오로 6세 홀에서 진행됩니다. 조금 혼잡했지만 그래도 비에 젖지는 않았네요! 여러분의 인내에 감사드립니다.

지난 주일, 곧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우리는 마르코 복음서가 전한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겪은 고통에 ‘인내’의 덕으로 응하십니다. 인내는 전통적인 덕목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덕입니다. 인내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견뎌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내’(pazienza)와 ‘고난’(passione)이라는 단어가 같은 히브리어 어원(pascho, ‘고난을 당하다’, ‘아픔을 견디다’)을 두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e) 속에서 그분의 인내가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붙잡히시어 뺨을 맞으시고, 부당한 유죄 판결을 온유함과 유순함으로 받아들이시며, 빌라도 앞에서 반박하지 않으시고, 군인들의 모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참아내시며,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시고, 당신을 십자나무에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의 도발에 응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인내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인내가 고통받는 것에 대한 금욕적인 저항이 아니라 ‘더 큰 사랑의 열매’임을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소위 “사랑의 찬가”(1코린 13,4-7 참조)에서 사랑과 인내를 밀접하게 연관시킵니다. 실로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첫 번째 특성을 설명하면서 “참고 기다림”과 “친절함”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리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놀라운 개념을 표현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분노에 더디신” 모습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탈출 34,6; 민수 14,18 참조). 인간의 악과 죄를 역겨워하지 않으시고 무한한 인내심으로 매번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 위대한 분이십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랑은 인간의 죄 앞에서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 사랑의 첫 번째 특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랑은 악에 선으로 대응할 줄 알고, 분노와 절망으로 물러서지 않으며, 오히려 인내하고 다시 시작하는 모든 위대한 사랑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람이 어떤 악도 씩씩하게 견딜수록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더욱 커진다”(『인내론』(De patientia), XVII)고 말했듯이 사랑은 인내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보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더 나은 ‘증거’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룩한 인내심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어머니와 아버지, 노동자, 의사와 간호사, 병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성경은 “참을성 있는 이는 용사보다 낫다”(잠언 16,32 참조)고 말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는 종종 인내심이 부족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 모두는 인내심이 바닥납니다. 인내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필수 비타민”과 같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내심을 잃고 악에 악으로 반응하곤 합니다. 침착함을 유지하고, 본능을 조절하고, 나쁜 반응을 자제하고, 가정이나 일터 또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언쟁과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 이유에 대한 답은 명확합니다. 곧,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내는 단순히 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소명’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께서 인내하셨다면 그리스도인도 인내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상황이 무르익기를 기다리기보다 사람들이 즉시 바뀔 것이라는 기대를 품으며 서둘러 “모든 것을 지금 즉시 해결”하길 바라는 오늘날의 만연한 사고방식에 역행하라고 요구합니다. 조급함과 조바심이 영성생활의 원수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왜 그럴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이는 지치지 않고 화를 내지 않으며 최후통첩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내하시는 분, 기다릴 줄 아시는 분입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는 인내심을 갖고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립니다. 그리고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달려나가 아들을 안아줍니다(루카 15,21 참조). 혹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떠올려 봅시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잃지 않도록 수확 때가 오기 전에 성급히 악을 제거하지 않으십니다(마태 13,29-30 참조). 인내를 통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제자매 여러분, 어떻게 ‘인내심을 키울 수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가 가르친 것처럼, 인내는 성령의 열매(갈라 5,22 참조)이므로 성령께 청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인내라는 온유한 힘을 주십니다. 인내는 온유한 힘입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것뿐 아니라 악을 참아내는 것을 아는 것도 그리스도인 덕의 특징”(성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Discorsi), 46,13)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번 성주간 동안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관상하며 그분의 인내심을 배우는 것도 우리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또 다른 좋은 훈련은, 몹시 까다로운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서, 잘 알고는 있지만 우리가 소홀히 했던 자비의 행위를 그들에게 실천할 수 있도록 “까다로운 사람들을 참을성 있게 견디는”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까다로운 사람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견뎌내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들의 얼굴과 잘못을 구별하면서, 하느님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연민으로 그들을 대할 수 있도록 청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우리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에 따라 그들을 분류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잘못이 아니라 얼굴과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삶에 숨결을 불어넣는 덕인 인내심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넓히는 게 좋습니다. 예를 들어 『준주성범』(L’Imitazione di Cristo)의 권고처럼, 세상을 우리 자신의 문제만으로 채우지 말고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하느님을 위해 참는 것이라면 하느님 대전에는 공로가 되지 않을 것이 없다”는 점을 기억하며 “남들이 당하는 보다 큰 괴로움을 자주 생각하여 네가 당하는 작은 괴로움을 잘 참는 법을 배워야”(제3권 20장 참조) 합니다. 아울러 욥이 가르쳐준 것처럼, 우리가 시련에 휩싸일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고한 확신과 희망 안에서 하느님의 새로움에 우리 자신을 열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인내란 악을 견뎌낼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두 사람이자 두 명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스라엘인이고 한 사람은 아랍인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 싸움에서 딸을 잃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 친구입니다. 전쟁의 적대감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며, 같은 십자가를 짊어졌던 두 아버지로 친교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딸들을 잃고 고통을 나눈 이 두 사람의 아름다운 증거를 생각합시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증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