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피상적인 생각, 선과 악을 사소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팽배한 세상에서 ‘현명’(prudenza)에 관한 고대의 가르침을 되살려야 마땅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3월 2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에서 현명에 관해 설명하며 덕에 관한 일련의 교리 교육을 이어갔다.
교리 교육: 악습(악덕)과 덕(미덕) 12. 현명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교리 교육은 현명의 덕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명은 정의, 용기, 절제와 함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추덕(virtù cardinali)에 속하는 덕입니다. 사추덕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하는 특성이 아니라 고대 지혜의 유산이며 특히 그리스 철학자들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만남과 토착화 작업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가 바로 ‘덕’(virt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중세시대 저술에서 덕은 단순히 영혼의 긍정적인 자질을 나열하는 목록이 아니었습니다. 중세 신학자들은 고대 저술가들의 생각을 그리스도교 계시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면서 7가지 덕(향주덕 3가지, 사추덕 4가지)을 일종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상정하고 각각의 덕이 그 안에서 조화로운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건축에서 기둥, 기둥머리의 역할처럼 덕에도 본질적인 덕과 부차적인 덕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세시대 대성당의 건축양식만큼 인간 안에 존재하는 조화와 선을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긴장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추덕 가운데 현명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현명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주저하거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의 덕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현명은 단순히 신중함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현명을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이 인간의 지성과 자유에 달려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창의적입니다. 숙고하고 평가하고 복합적인 현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감정이나 게으름, 압박감과 그릇된 생각에 압도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피상적인 생각, 선과 악을 사소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팽배한 세상에서 현명에 관한 고대의 가르침을 되살려야 마땅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현명을 “올바른 행동규범”(recta ratio agibilium)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행동을 선으로 이끌기 위해 행동을 다스리는 역량으로, 이러한 까닭에 현명은 “덕의 마부(馬夫)”(auriga virtutum)라고 불립니다. 현명한 사람은 선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책 속에 기록된 인생은 언제나 순탄하지만, 일상의 풍파 속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종종 불확실성 속에서 살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되는대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상황을 숙고하고 조언을 구하며, 넓은 시야와 내면의 자유를 바탕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지 선택합니다. 우리는 항상 인간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크게 미끄러지는 일은 피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모든 분야에는 피상적인 농담으로 문제를 희석시키거나 항상 논란을 일으키는 경향의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현명은 행동을 이끌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의 자질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다스리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를 어우러지게 해야 한다는 것,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명은 또한 “완벽한 것은 선의 원수”(optimus est hostis bonorum)라는 속담을 가르쳐 줍니다. 실제로 특정 상황에서는 지나친 열정이 재앙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순차적으로 진행해야 할 일을 망치거나 갈등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폭력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과거의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통이 지혜의 유산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삶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끊임없는 겹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장 세상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세밀한 부분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또한 ‘선견지명’이 있습니다. 노력할 목표를 결정한 후에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합니다.
복음의 많은 구절은 우리가 현명함을 배우는 데 도움을 줍니다. 예를 들어,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사람은 슬기롭고,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마태 7,24-27 참조). 또한 등과 함께 기름을 가지고 온 처녀들은 슬기롭고, 그렇지 않은 처녀들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마태 25,1-13 참조). 그리스도인의 삶은 순박함과 슬기로움의 조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다음과 같이 권고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성인(聖人)이 아니라 ‘영리한 성인’이 되기를 바라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명함이 없으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빠지기 때문입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