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의 가톨릭 교회는 기도의 시작과 마침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합니다. 세가지 위격이지만
본질은 하나이신 하느님. 셋이지만 하나이시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마틴 루터는 삼위일체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려고 하면 당신의 구원이 위험에
처하게 되고,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하면 정신이상자로
몰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1세기의 영국의 안셀모 성인은 ‘알기 위해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삼위일체교리에 딱 맞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삼위일체가 실재임을 믿을 때
삼위일체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낙관적인 희망을 갖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었다고 말합니다(16).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행위의 가장 정점은 예수의 이 세상으로의 침투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창조의 모든 것은 무엇을 만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간을 향한 삼위일체의 사랑때문이었다고
교회는 고백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시면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는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분은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세계로 빈손과 맨몸으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이 사람에 대한 이해와 수용에
바탕을 둔 사랑에서 비롯되는가를 질문하게 되는 대축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