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바티칸 뉴스] “마음이 어두울 때 예수님을 찾읍시다. 그분은 항상 응답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2년 11월 16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식별에 대한 여덟번째 교리 교육을 진행했다. 교황은 “영혼의 흔들림”으로 이어지는 ‘영적 고독’을 설명했다. 교황은 ‘영적고독’을 회피하지 말고 삶의 성장을 위한 기회로 삼으라고 격려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식별에 대한 교리 교육 8. 우리는 왜 ‘영적 고독’을 느끼는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오늘은 ‘식별’에 대한 교리 교육을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지난번 교리 교육을 통해 우리는 순간의 감정에 따라 성급한 결정을내리지 않고, 너무 늦게 결정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읽어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읽어낼 줄 알아야 하고, 그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이 어둡고 슬플 때 느끼는 영적 상태를 우리는 ‘영적 고독(desolazione: 영적 메마름, 영적 황폐함,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부릅니다. ‘영적 고독’은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약간의 불만, 약간의 건전한 슬픔, 고독 속에 머물 수 있는 건전한 역량, 나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나 자신과 함께할 수 있는 건전한 역량이 없다면 우리는 항상 겉돌다가 우리 실존의 핵심과 결코 만나지 못하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영적 고독은 “영혼의 흔들림”을 초래합니다. 사람이 슬플 때에는 마치 영혼이 흔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영적 고독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하고, 주의 깊음과 겸손을 북돋아 주며, 순간적인 충동에서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이는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영성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조건들입니다. 완벽하지만 감정 개입이 없는 “격리된” 평온이 우리의 선택과 행동의 기준이 될 때 우리는 비인간적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감정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감정은 우리 인간성의 일부입니다.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비인간적이게 되고, 감정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심해지고 우리 자신의 고통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런 무관심의 길로는 그러한 “완벽한 평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적당히 거리를 두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이 격리된 거리감은 진정한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세균이나 질병에서 벗어나려고 격리된 실험실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에게 있어 ‘끊임없이 움직이는 마음, 부단한 마음(인퀴에투디네, inquietudine)’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결정적인 동력이었습니다. 인위적인 평온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건전한 ‘인퀴에투디네’, 다시 말해 끊임없이 요동치는 마음, 부단하게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마음은 좋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에디트 슈타인 성녀(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 주세페 베네딕토 코톨렌고 성인, 샤를 드푸코 성인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중요한 선택에는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 모든 사람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따릅니다. 다시말해 중요한 선택은 복권 추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가가 따릅니다. 여러분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마음으로 치러야 하는 대가, 결단의 대가, 약간의 노력이 따르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결정에 대가를 치르고 무관심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무관심의 상태는 항상우리를 넘어지게 합니다. 영적 고독은 또한 ‘거저 주어진 것’을 돌아보라는 초대, 항상 감정적 만족만을 위해 행동하지 말라는 초대입니다. 영적 고독은 우리에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고, 주님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성숙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이 관계는 단순히 주고받는 교환의 관계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봅시다. 어린 시절, 우리는 종종 부모님을 찾곤 합니다. 부모님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말입니다. 장난감, 아이스크림을 살 돈, 허락 (…) 등을 얻기 위해 말입니다. 우리는 부모님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필요에 따라 그분들을 찾습니다. 가장 큰 선물이 그분들, 부모님인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이러한 사실을 서서히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 대한 진정한 관심은 안중에도 없고 무엇을 요구하는 데 그치고 맙니다. 우리는 주님께 바라고, 바라고, 바라기만 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자주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고 말합니다. 군중은 단순히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병의 치유나 물질적 도움을 얻기 위해 그분을 찾았다고 복음서는말합니다. 예수님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늘 혼자였습니다. 몇몇 성인들, 심지어 어떤 예술가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상태를 묵상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 “어떻게 지내시나요?”라고 안부를 묻는 것이 한편으론 이상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분의 인성과 고통, 심지어 그분 고유의 고독과 함께 참되고 진실한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아름다운 방법입니다. 우리의 삶을 마지막까지 온전히 우리와 나누기를 원하셨던 주님이신 그분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방법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머무는 것을 좋아하고 그들을 점점 더 알고 싶어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목적 없이’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을 배우는 게 우리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영성생활은 우리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기술도, 우리에게 달려 있는 내적 “행복”을 위한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성생활은 우리 인간의 범주 안으로 축소시킬 수 없는 살아 계신 분과의 관계,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고독’은, 하느님 체험이 황홀한 감동의 한 형태이며 우리가 바라는 열망을 단순히 투영하는 것이라는 반론에 대한 가장 분명한 대답입니다. 영적 고독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완전한 어두움입니다. 그런 영적 메마름 속에서도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 경우, 하느님 체험이 우리 열망을 투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항상 그것을 계획할 것이고, 우리는 항상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들려주는 축음기처럼 만족하는 데 그칠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종종 우리를 감동시켰던 성경 내용과 구절들이 오늘날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어떤 열의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느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체험과 같이,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거나 회피하고 싶었던 경험, 만남, 독서가 예상치 못하게 놀라운 평화를 가져옵니다. 영적 메마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영적 메마름에서 도망치지 말고, 인내를 갖고 영적 메마름과 함께하십시오. 영적 메마름 속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님을 찾으려고 노력하십시오. 응답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절대 낙심하지 마십시오.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단호하게 시련에 맞서십시오. 우리 내면에서 우리를 기도로부터 떼어놓으려 하는 집요한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 목소리가 유혹자의 목소리라는 것을 밝혀내는 법을 배웁시다. 그 목소리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그 목소리가 시키는 것과는 정반대로 행합시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