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신명기 저자는 히브리어에서 어원이 같은 두 단어를 사용합니다.
광야(廣野) - 미드바르 (מִדְבָּר)
말 - 다바르 (דָבַר)
“이것은 모세가 요르단 건너편 아라바에 있는 “광야”에서,
온 이스라엘에게 한 “말”이다.” (신명기 1,1)
광야란 무엇입니까? 광야는 떠돌이 삶을 상징하는 곳인가요?
생명을 찾기 힘든 희망이 사라진 곳인가요?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떠도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요? 하지만 당신의
섭리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의 시간은 가나안이
목적지가 아니라 하느님을 찾아가는 목적을 위해서 존재했던
과정이었습니다. 이렇듯 광야는 주님께서 우리 삶에 말씀을
건네주는 장소입니다. 광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장소인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성스런 장소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의 색깔은
다양합니다. 위로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도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십니다.광야의
또 다른 얼굴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거짓의
얼굴. 무엇보다 광야는 우리 인생의 아픔과 고통속에서
피할 수 없는 거짓의 흐름속에 존재합니다. 그때 하느님의
목소리만 “걸러” 들을 수 있는 작은 가능성에 자신의 존재를
걸어야 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광야앞에서 하느님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그 순간은
은총의 시간이요 희망의 시간이 됩니다.
주님, 매일의 광야에서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고독을 원합니다. 그 순간이 구원이고
성스러운 공간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구원은
멀리서 찾는 목적이 아니라 나의 광야의 체험에서 직접
길어내어야하는 경험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