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죽은 문자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의 강이라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다. 늦은 나이에 영세를 받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기도를 매일의 삶에 일부로 여기며 사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교회안에 거의 40년 가까이 있으면서도 신앙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부활이라고 하는 말에 여전히 마음이 쉽게 뜨거워지지 않는다. 이제까지 내 마음에 더욱 중요한 사건은 예수님의 육화사건인 그리스도의 탄생에 머문다. 탄생을 둘러싼 상징과 동방박사나 목동, 성요셉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삶에서 쉽게 만날 수 없으나 새겨야 할 ‘인간의 흔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부활의 의미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게 될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내겐 그 시간은 그리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부활사건이전에 반드시 지나야 할 기간이 바로 예수님의 고난이다. 그 고난의 기억을 더 특별하게 살아내는 2023년 사순절은 2월 22일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었다. 영어로 사순절은 Lent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앵글로 색슨 족의 ‘길이’이라는 뜻인 “lencten'’에서 유래한다. 생명이 탄생하는 시기에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가장 역설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그만큼 사순절은 아이러니의 시기이기도 하고 병렬로 서서 대립하는 양극단의 의미를 살아가야하는 긴장의 시기이기도 하다. ‘사순’(四旬)이란 40일을 뜻하는 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면서 지내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행동으로 채워지는 영적 비움의 시간이라고 한다. 40일을 정한 것은 성경에서 노아 홍수 기간이 40일이며 (창세기 7.4),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지낸 기간이 40일이며 (창세기 24.18),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가기 위해서 40일간을 걸었던 것,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던 기간 (탈출기 16.35),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출발하는 순간 가졌던 광야에서 40일간 유혹을 받았던 때를 (마르코 1.13) 상기시키는 숫자이다. 그런데 이 40일간 혹은 40년의 시간을 고난에 초점을 맞추어서 사순절의 의미를 상기하는 것은 의미가 반감되는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 시간은 이스라엘 역사의 인물들이 더욱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고 그 시간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더욱 하느님의 사람들로 변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즉 그 기간은 준비와 갱신 그리고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기간이었다. 왜 신앙이 살아있는 생물인가? 이사야 예언자 글을 읽을 때였다. 이사야 예언자는 단식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반전시키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단식을 제시한다. 이것을 세 단어로 정리할 수 있겠다: 풀어주기. 나누기. 받아들이기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58, 6-7) 사순절은 무엇보다 풀어주는 시기이다. 무엇으로부터 누구에게서 풀어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하게 된다. 과거의 어두움에 잡혀있던 나를 풀어내는 시기. 우상에게 사로잡혔던 나를 해방시키는 시기. 마음의 짐에 억눌려있는 친구와 함께하기. 어려운 관계를 회복시키는 얽킨 인간관계를 풀어내는 시기. 미래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나를 해방시키는 시기… 즉 내면의 자유인이 되는 준비를 더욱 하는 시기이다. 사순절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시기이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나누어야 할 것이 없다는 얕은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나누는 사람들로 창조하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사순시기는 특히 영적으로나 어려운 사람을 어루만져주는 것은 그들에게 영적인 빵을 나누는 시기이다. 사순절은 나와 다른 사람들, 집을 나간 사람들, 이방인들을 받아들고 환영해주는 시기이다. 맞아들이고 받아들이는 행위는 나를 무장해제한다는 선언이다. 나의 무장이 단단하면 할수록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언어는 투박하기 마련이다. 특히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싶다. 이렇게 우리가 사순절을 잘 맞이하게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에 대해서 이사야 예언자는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58, 8-9) 이사야의 단식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사순절을 다시 새롭게 이해한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이나 죽음이 핵심사건이지만 그 사건이 가져오는 궁극적인 결과는 부활이다. 희망과 생명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멈추어서는 안되는 시간이다. 즉 사순절은 죽음의 시기가 아니라 생명의 시기이기도 하다. 생명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그렇게 사순절은 예수님의 수난의 깊은 그림자가 드리운 어두움과 고통의 시기라기 보다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대하고 준비하는 기간이다. 사순절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더하기 보다무엇을 포기하고 절제해야하는 시간이다. 단식은 우리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뺄셈을 하는 것이고, 기도는 영적으로 우리의 희망의 공간을 비워내는 것이고 자선은 우리의 물질적인 곳간을 비워내는 나누는 일이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갈바리아산에 못박히시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길위에 떨어뜨린 피땀안에 숨겨진 사랑의 씨앗을 보는 시간이다. 우리 삶의 십자가는 나의 희망과는 달리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것보다는 내가 알아차리고 그것을 선택하는 결과물이 아닐까 한다. 내가 십자가를 선택할 수 있는 힘과 용기는 내가 예수님께 사랑 고백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때 흘러오는 선물이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고통의 길에서도 십자가에서 번져오는 부활과 사랑의 빛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시기이다. 십자가에서 빛은 언제나 그 자체로 나오기 마련이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기를 멈출 때 십자가는 빛과 위로의 원천이 아니라 그냥 나무조각에 불과할 것이라고 믿는다.
작품명 : 재의 수요일 작가: Carl Spitzwe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