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길:잠신潛伸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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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1.2023-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루카 2,16-212023-01-01 18:12
카테고리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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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19) 


 어떤 나라에 한 엄마가 계셨습니다. 

막내 아들은 어느 날 사제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엄마의 아들을 기다리는 의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처음의 엄마의 기다림은 아들이 엄마의 집으로 돌아오는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엄마의 기다림은 아들이 예수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기다림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 기다림은 이제 하늘에서 아들의 길을 지켜보는 기다림이 

되었습니다. 기다림은 그렇게 끝이 존재합니다. 


주님,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이제까지 인간이 

경험하지 못했던 2023년은 시간의 벽을 부수고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는 바로 이 “기다림”이라는 말에 

저의 마음이 자리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기다리는가라는 근본질문 외에 

얼마나 기다리는가 혹은 어떻게 기다리는가하는 

다른 차원의 질문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일러주는 근본적인 삶의 질문입니다. 


참고, 인내하고, 기다린다라는 단어는 요즈음은 인간심리의 

화석층에서나 발견 될 수 있는 덕으로 변화된지 오래되었습니

다. 기다림은 이제 이 세상에서 증발되어 버린 듯 합니다. 

인터넷은 더욱 우리를 빠른 기차에 올라타지 않으면 

도태되거나 실패한다는 불멸의 현대법칙을 계속해서 

토해냅니다. 기다림은 정녕 우리 시대에서 사라진 

박물관의 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제가 기다림을 생각하게 하시는가요? 

기다림은 분명히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기다림은 불확실한 

상황을 살아가는 불안을 야기하지 않습니까? 기다림에 지친

 우리를 시간의 중력을 뿌리치고 어디론가 스스로 움직이는 

항성이 되라고 우리를 부추기지 않습니까? 기다림에 동력을

 상실한 우리에게 내면의 지평을 열기 보다 순간의 

만족이 전부라고 현혹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기다림은 압축된 인간언어로 상징화된 삶을 표현하는 

시인처럼 우리를 마치 시인으로 변화시킵니다. 

시인은 새로운 언어를 조탁합니다. 

기다림은 성인들이 당신의 말씀에 순명했던 것같은 순명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순명은 당신의 저를 향한 운명에 

대한 귀를 세워 들음입니다.

기다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나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세례식입니다. 

기다림은 기다리는 사람을 향해 조건없이 

고스란히 바쳐진 사랑의 제물입니다. 

기다림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게 해줍니다. 

기다림은 우리 마음안에 기다림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그 공간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기다림은 나의 시계를 멈추게 하고 상대방의 시간으로 

나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의미는 상대방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을 통제하지

 않고, 상대방의 흐름에 저를 맞춘다는 저의 무장해제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무장해제가 없는 한 기다림은 

상대방에게 폭력의 수단으로 변질 될 수가 있습니다. 

기다림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품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뜻을 만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됩니다. 


어떤 기다림도 끝이 존재합니다. 그 기다림의 끝에 있는 

미래가 어떤  모습인가를 우리는 모르고 두려워하기에 일찍 

기다림의 문을 닫어걸려고 합니다. 안전장치를 쉽게 걸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다림의 끝은 구원입니다. 구원이 있기에 

보상이 있기에 기다림을 구하지 않으렵니다. 

저는 기다림안에서 저는 저의 존재가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가를 알 수 있기에 제가 이미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불안함가운데서 안정의 가치를 

맛봅니다. 기다림의 애처러움 가운데 저는 눈물의 아픔을 

더욱 맛봅니다. 기다림의 슬픔가운데 저는 기쁨을 맛봅니다. 기다림의 마지막은 언제나 당신의 뜻입니다. 올 한해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제 자신의 소명을 만나고 그 소명에 생명을 

불어넣는 살아있는 삶을 만나기까지 저는 기다리려고 합니다. 

성모님이 보여주는 모든 것을 마음에 곰곰이 품고 되새기는 

태도가 바로 기다림의 고도화된 미학입니다. (루카 2,19)


그러나 기다림은 바로 당신이기에 저는 기다림을 선택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당신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사실에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을 상대화 시킬 수 있습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는 지 저를 시험하는 한해이기를 바랍니다. 기다림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이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도 당신이라는 사랑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축복을 한해를 시작하는 오늘 당신의 손끝에서도 저희 위에 내려주기를  기다리면서 올 한해를 

시작합니다. 그 축복이 무엇보다 저의 기다림의 창고에 대한 축복이기를 바랍니다. 아멘.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민수기 6,24-26) 

기다림.jpeg

사진ⓒ정강엽

옥천, 피정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