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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주교 단체성과 시노달리타스2024-01-28 00:16
카테고리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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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적 상상을 찾아서

저자: 토마스 하울랜드1)
번역: 부산교구 서동성당 노우재 신부

이탈리아어판: https://www.laciviltacattolica.it/articolo/collegialita-episcopale-e-sinodalita/ 
영어판: https://www.laciviltacattolica.com/episcopal-collegiality-and-synodality/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초대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여러 글과 담화에서 매우 두드러진다. 교종은 아마존 시노드와 가정 시노드를 통해서 시노드의 모습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 글에서는 단체성collegiality의 의미와 유구한 시노달리타스의 역사를 간략하게 고찰한 다음 시노달리타스를 이루어나갈 토대가 되는 집단적 상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찰스 테일러가 새로운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y이라고 말한 것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현실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수많은 주제들에 대해 논의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각광받은 주제는 단연 주교 단체성일 것이다. 교회사학자 존 오말리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공의회에서 주교 단체성은 피뢰침과 같은 역할을 했다. 다른 회기에서는 「인류의 빛」 제3장만큼 상세하게 논의하고 검토한 문헌이 없었다. 「인류의 빛」 제3장이 대다수의 찬성으로 승인된 후에도 물음은 그치지 않았다. ‘더 높은 권위로부터’ 전달된 그 유명한 사전 설명 주석(Nota praevia)으로 말미암아 논의는 끝까지 진행되었다. 공의회의 영향력 있는 소규모 그룹은 단체성을 지속적으로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쇄신이나 발전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위태로워졌음을 알려준다.”2)
주교 단체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논쟁이 격렬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주교 단체성은 왜 그렇게 부각되었는가?
■ 주교 단체성episcopal collegiality의 의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서 교종의 권위는 강조했지만 교회 안에서 주교들의 역할, 교종에 대한 주교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시간 문제 때문에 논의하지 못했음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작업은 중단되었고 이 때문에 교회 안에 균형을 잃은 교회론이 생겨났는데, 이 문제를 분명히 직면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많은 논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제1차 회기(1962년 10월) 동안 각 민족의 언어로 전례를 거행하는 안건에 대해 논의할 때, 교부들은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의 사용 여부는 지역 차원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관할 지역 주교회의에 달려있다”(competenti assemblee episcopali territoriali)라고 강조했다(전례헌장[SC], n. 22). 다시 말해, 자기 언어를 사용하는 해당 국가 또는 지역의 주교들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떤 형태의 조직이 어떤 방식으로 결정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교회에 관한 문헌 「인류의 빛」(LG)을 논의할 때까지 명료화되지 않았다.
제1회기에서 교회에 관한 예비 문서가 거부된 후, 1963년 10월 시작한 제2회기에서는 주교 단체성 문제에 대한 공의회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한 투표가 있었다. 84%의 주교들은 “주교 단체 또는 주교단은 사도단을 계승하고, 자신의 단장인 교종과 일치하면서 교회 안에서 최고의 충만한 권한을 갖는다.”는 명제를 승인했다.3) 후속 작업이 계속 진행되어 다음과 같은 최종 본문이 형성되었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거룩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하나의 사도단을 이루듯이, 비슷한 이치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종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도 서로 결합되어 있다. 전 세계에 세워진 주교들이 일치와 사랑과 평화의 유대로 서로 교류하고 교종과 친교를 이루던 매우 오랜 옛 규율과 공의회 모임 자체가 주교단의 단체적 본질과 특성을 드러내 준다. 공의회를 통하여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든 공동으로 결정하고 많은 이의 의견을 숙고하여 판단한다. 여러 세기의 흐름 속에서 개최된 세계 공의회들이 그 단체성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LG 22). 
마지막 회기에 반포된 주교의 사목 임무에 관한 교령Christus Dominus(CD)에서 주교들은 이렇게 밝혔다. “주교들은 성사적 축성의 힘으로 또 주교단의 단장과 그 단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로 주교단의 구성원이 된다. ‘주교단은 교도권과 사목 통치에서 사도단을 계승할 뿐 아니라 그 안에 사도단이 계속하여 존속하며, 그 단장인 교종과 더불어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력의 주체로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단장 없이는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며, 또한 그 권력은 오로지 교종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행사될 수 있다’(LG 22). 이 권력은 ‘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한 양식으로 행사된다’(LG 22)”(CD 4).
주교들은 이어 주교들 자신이 구성원인 기구의 설립을 염원하며 그 역할을 이렇게 제시했다. “교종이 제정하였거나 앞으로 제정할 방법과 비례에 따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선정되는 주교들이 ‘주교대의원회의’[주교시노드]라는 고유한 명칭으로 불리는 평의회에서 교회의 최고 목자에게 더욱 효과적인 협력을 제공한다. 이 회의는 전체 가톨릭 주교단을 대표하느니만큼 모든 주교가 교계적 친교로써 보편 교회를 함께 돌보고 있음을 드러낸다”(CD 5).
공의회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주교들은 초기 사도들과 같이 모임, 단체를 형성하며 (라틴어collegium은 “단체, 조합, 회합에 모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단순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단체적으로 함께 고려된다는 점이다. 사도들을 일컫는 “열둘”은, 마지막 시간 하느님께서 소집하여 모두 하나되게 하실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상징하는 숫자였다. 이런 뜻에서 주교들은 서로 “일치와 사랑과 평화의 유대로” 결합한다. “주교단은 그 단장이 교종이고 그 단원들은 성사적 축성 및 그 단장과 단원들과의 교계적 친교로 주교들이고 그 안에 사도단이 계속하여 존속하며, 그 단장과 더불어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력의 주체로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단장 없이는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다”(『교회 법전』 제336조). 미국의 신학자 리차드 게일러데츠(Richard Gaillardetz)에 따르면, “보편 교회 안에서 권력과 권한의 공유를 언급하는 이 조항은 단체성에 대한 핵심 가르침이 된다.”4)
둘째, 초기 교회에서 주교들의 단체적 행위는 통상적인 공의회 또는 시노드 모임에서 이루어졌다. 공의회 모임은 “많은 이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결정을 내림으로써 중요한 문제에 대한 공동의 판단이 어떠한지 알려 주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주교 단체성을 통해 교회의 시노드 또는 공의회 전통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교 단체성은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주교들의 온전한 일치를 드러내는 유구한 전통이다. 신앙과 윤리에 대한 중요 결정은 단체적으로, “베드로와 함께, 베드로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 교구의 주교 개인이 독자적으로 결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의회의 의도는 그 당시 논쟁 과정과 신학자들이 남긴 글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총대주교 막시모스 4세 사이그(Maximos IV Saigh)는 동방 교회의 유구한 시노드 경험을 언급하며 시노드를 보편 교회의 모델로 제시했고, 500명 이상의 주교들은 교종에게 서간을 보내 시노드 설립을 청원했다.5) 마찬가지로, 신학자 요셉 랏칭거는 당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강연을 통해 초대 교회 지역 시노드의 단체성 개념은 교회들의 친교(communio Ecclesiarum)를 표방한다고 밝혔다.6) 당시 공의회는 로마 교종의 권위 수행과 주교들의 교회 운영 사이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분명히 의식했던 것이다.
주교의 사목 임무에 관한 교령Christus Dominus 제3장은 그 연관성을 매우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교회의 초세기부터 개별 교회를 맡은 주교들은 형제애의 친교로 또 사도들에게 맡겨진 세계 선교를 향한 열정으로 개별 교회의 선익과 공동선을 증진하려고 힘과 뜻을 모았다. 이러한 목적으로 교회회의 [시노드] 또는 관구 공의회 또는 전국 공의회 등이 열렸으며, 거기에서 주교들은 신앙 진리의 교육과 교회 규율의 확립에서 여러 교회가 지켜야 할 동일한 규범을 제정하였다. 이 거룩한 공의회는 귀중한 교회회의[시노드]와 공의회의 제도들이 새로운 힘을 갖고 여러 교회에서 시대 환경에 맞추어 신앙의 진보와 규율의 준수에 더욱 적절하게 더욱 효과적으로 이바지하기를 바란다”(CD 36). 
현 시대에 이 모든 것은 주교회의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주교들의 사목임무에 관한 교령은 강조한다. 아직 주교회의가 설립되지 않은 지역에는 주교회의가 설립되고 정관도 마련해야 한다고 또한 밝힌다. 주교들은 자신들의 의향과 의지를 매우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논쟁은 왜 그토록 격렬했는가?
■ 공의회 내의 대립 
공의회가 강조하는 초대 교회와 중세 이래 오늘날의 교회 사이에는 중앙집권화된 강력한 교종직과 교황청이 들어서 있다. 교회사학자 리처드 서던 (Richard W. Southern)은 이렇게 말한다. “베다부터 루터에 이르기까지, 8세기 서구의 황제 권위가 교종권에 종속된 때부터 16세기 교종의 권위가 약화되는 시기까지, 동유럽과 서유럽의 정치적 유대가 단절되던 시절부터 구대륙이 대서양을 넘어 확장되던 시절까지, 이 시기 전반에 걸쳐 교종직은 서유럽을 지배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7)
수세기에 걸친 이 시기 동안 교종직은 거대한 변화를 겪었는데, 교종직이 그토록 강력해진 이유는 복합적이다. 몇 가지 이유만 제시해 보겠다. 먼저, 로마가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지라는 사실이 로마의 주교에게 의미심장한 수위권을 부여했다. 또한, 로마 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전하면서 로마가 불안정해졌고, 이어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는데, 이때 몇몇 교종이 야만인들에게서 로마를 지켜냈고, 기근과 페스트를 이겨냈다.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말미암아 로마는 고대의 총대주교좌였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과 단절되는데, 이때 몇몇 교종들은, 근거가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교회들과 주위 세상에 대한 자신의 수위권을 주장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했고, 서구의 일치를 와해시켰다. 이에 대해 로마는 자기 권위를 더욱 강력히 주장했고, 19세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종 무류성 교의는 그 정점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이러한 역사를 잘 알고 있었고, 무류성 가르침을 부정하거나 반대하려 하지 않았다. 「인류의 빛」 제25항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주교들은 교종 무류성이 주교단과 또 주교단의 무류성과 균형이 맞아야 한다고 여겼다. 16%의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소규모 그룹은 교종의 권위와 능력이 제한될까 두려워하기도 했다(이전 투표에서 주교들 84%가 단체성을 지지했음을 기억하자). 공의회는 주교들과 교종의 대립을 조장하는 것은 모두 배격했고, 이를 위해 교종을 주교단 안에 편입하여 그 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소규모 그룹은 교회 운영을 위한 교종의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여전히 걱정했다. 이런 두려움을 없애고 또 소수를 끌어안기 위해, 바오로 6세는 마지막 순간 사전 설명 주석(Nota explicativa praevia)을 덧붙였고, 주교 단체성이 교종의 수위권을 제한하거나 조건을 설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했다.
■ 공의회 또는 시노드 전통 
교회 안에서 주교들이 하나의 단체를 형성하여 일치하는 행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2세기, 주교들이 지역 시노드에 모여 부활 날짜 등을 논의하며 교회의 질서와 규정에 위협이 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모임들은 “교회 생활의 통상적이고 필수불가결한 특성과 같았다. 보편 교회 안에 있는 지역 성찬 공동체들의 유대를 드러내는 정상적인 제도적 장치였다.”8) 2세기 중반부터 대 그레고리오 교종(590-604) 시절까지 주교들의 시노드와 모임은 400 차례 이상 개최되었다. 잘 알려진 사실이다.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의 수많은 공의회에 참석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주의자들을 거슬러 공의회 교령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지 않는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주교 단체성은 지역별, 지방별, 보편적 차원에서 실현되어 다양한 수준으로 현실화되었다. 최초의 보편 공의회였던 니케아 공의회(325)는 “모든 관구에서 격년으로 시노드를 개최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고 밝혔다. 모든 주교들은 시노드에 참가해야 했고, 교종들은 그 모임을 진작시켰다. 시노드가 실제 격년으로 개최되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당대 교회의 기대를 엿볼 수 있다. 공의회 또는 시노드의 이러한 전통은 초세기 교회에 국한되지 않았고, 결정 과정의 필수불가결한 구성 요소로서 계속 이어졌다. 또한, 시노드 전통은 다양한 지역 교회들의 일치를 드러내면서, “(개별교회가 이루는) 친교들의 (보편교회 차원의) 친교”communio communiorumcommunio communiorum로 여겨졌다.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까지 이르는 첫 일곱 보편 공의회에서 반포한 교령들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런데 총 공의회나 세계 공의회로 간주되지 않은 지역별 지방별 시노드/공의회들도 자주 개최되었고, 여기서 이루어진 결정들이 교회의 보편적 전통으로 수용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후, 교회가 점차 “그리스도교 문명”이라 불리는 중세의 사회 질서로 변화되면서, 공의회는 세속의 지배자들과 권력자들에게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로마에서 특별히 그러했다. 공의회가 주교들만의 모임이 될 수 없게 되었으며, 세속 권력의 대표자들이 포함되었다. 교회사학자 클라우스 샤츠(Klaus Schatz)는, “그리스도교의 제1천년기 교회 공의회들은 순전히 주교들의 회합이었으며 보통 황제가 주재하였다. 그런데 중세의 공의회들은 교회의 회합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의 회합이기도 했으며 교종이 주재하였다.”고 서술한다.9) 시노드가 정치화되면서 시노드의 원래 성격과 목적으로부터 멀어졌다. 11-12세기 그레고리오 개혁은 이러한 세속 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되찾고자 한 시도였다. 
14-15세기 서구 대이교는 공의회 전통이 다시 살아나 활력을 얻는 기회가 되었다. 대립 교종이 선출되던 시절이었고, 세 명의 교종이 등장하여 세력을 규합하던 때이기도 했다. 이러한 스캔들을 종식시키고 일치를 회복하기 위해 공의회가 여러 차례 개최되었는데, 그 가운데 콘스탄츠 공의회(1414-18)가 가장 중요하다. 공의회는 유명한 교령 핵 상타(Haec Sancta)에서 자신의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유래하고, 공의회는 교회의 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을 행할 권한이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 교종을 해임할 수도 있다고 천명했다. 이 선언에 전제된 신학은 교회가 신자들의 공동체라거나 교회의 최종 권위가 이 공동체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를 집회로 여기는 이 개념의 뿌리는 바오로의 그리스도의 몸 이미지에 있다. 교회는 지역 공동체로부터 시작되는 집회들의 연결이며, 그 다음에는 교구나 이전의 총대주교좌와 같은 관구로 연결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몸인 보편 교회가 있다. 이 공동체들을 지역 시노드와 지역 공의회가 대표하고, 전체 교회는 총 공의회 또는 보편 공의회가 대표한다는 것이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대립 교종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이교에 종지부를 찍었고, 1417년 새 교종 마르티노 5세를 선출했다. 또한, 교령 Frequens를 반포하여, 앞으로 교종은 5년 후 그리고 7년 후에 다시 공의회를 소집해야 하며, 이후 십년마다 공의회를 개최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리하여 파비아, 시에나, 바젤, 피렌체에서 공의회가 열렸고, 제5차 라테란 공의회도 개최되었다(1512-17). 1517년 루터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발표하여 종교개혁을 촉발시켰다. 사실 그는 위기 타파를 위한 “자유롭고 개방된 공의회” 개최를 먼저 요구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교종들은 공의회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까 두려워 루터의 요청을 수용하지 않았다. 결국 카를 5세 황제에 의해 교종은 강제로 트렌트 공의회를 소집해야 했다(1545-63). 교종은 여전히 공의회를 두려워했고, 그의 편에 선 이들은 공의회 이론을 탈선이라 생각했으며, 심지어 이단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프랜시스 오클리(Francis Oakley)는 이들의 태도를 “제도적으로 보장된 망각”이라고 했다. 이와 흡사한 시도들이 이어졌지만, 친교의 신학 또는 집회로서의 교회 관념은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계속 등장했다.10) 16세기 영국의 성 토마스 모어와 리차드 후커의 저작에도 나타나고, 17세기 바올로 사르피(Paolo Sarpi)의 저서, 특히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에게 보낸 답신과 에드먼드 리허(Edmond Richer)의 저서에도 나타난다. 이는 또한 파리 대학교 신학대학이 표방한 교회론의 공식 입장이기도 했다. 자크 베니뉴 보쉬에(Jacque-Bénigne Bossuet) 주교가 편찬한 “갈리아 조항”은 이에 관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문건인데, 1682년 프랑스 성직자 대회에서 수용되었고,11)1801년 나폴레옹 협약에도 첨부되었다. 나폴레옹은 모든 신학교수들이 그 내용을 가르치도록 명령했다. 18세기 독일의 페브로니아니즘12)과 오스트리아의 조세피니즘13)은 이러한 입장을 강력히 표방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소르본 신학대학의 학장 앙리 마렛(Henri Maret)과 몇몇 주교들은 교회 운영에 대한 집회적 또는 시노드적 입장을 제시했는데, 당시 세속 권력과 국가 정부의 압력도 있었기 때문에 확산되지는 않았다.
교회에 대한 집회적, 단체적 개념의 역사를 상기한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회복하고자 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원상 복구, 즉 원천으로 돌아가도록 촉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4-15세기의 시노드 또는 공의회적 운동은 교종직을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려는 것이었다. 교종직이 다른 주교들 위에 독자적으로 행사된다는 관념은 19세기에 지배적이 되었고 지금의 우리는 더 익숙해져 있지만, 집회로, 공의회적으로 이해하는 교회의 자기이해와 늘 공존하였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상반된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보아서도 안 된다. 물론, 두 개념의 긴장은 오래 이어졌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를 병립시켰다고 해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 오늘날 교회를 위한 의의 
앞서 보았듯, 공의회 교부들은 “귀중한 교회회의[시노드]와 공의회의 제도들이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한다는 원의를 명시적으로 표방했다(CD 36).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세계화와 탈-근대성을 특징으로 한다. 두 현상 모두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며 다양한 해석도 가능하다. 자세한 내용은 다루지 못하지만 몇 가지 특성을 소개하면 이렇다.14) 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통신과 교통이 편리해졌다. 문화적 차이와 다원성에 대해 진지하게 의식하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⑵ 한 지역의 사건이 멀리 떨어진 다른 많은 지역에 영향을 미친다. ⑶ 지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 변증법적 관계가 있다. ⑷ 세계화와 함께 지역화가 점차적으로 진행 중이다. ⑸ 국경 출입이 용이해졌다. 민족 국가들이 국경 통제를 완화시켰다. ⑹ 표면적으로는 문화적 동일화가 진행 중이지만, 차이성, 타자성, 특수성이 강조되고 있다. ⑺ 중앙집권적 결정 과정은 약화되고, 참여와 절차적 민주주의, 대화와 상호 존중의 가치가 확산되는 추세이다. ⑻ 여성과 미성년자들의 존엄과 권리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런 사회적, 문화적 특성 가운데 몇 가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도 언급되는데,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강화되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대화와 자문이 가능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지역적 문화적 상이성을 존중하며, 여러 지역 교회들의 교류를 촉진하면서 보편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시노드와 공의회는 이 모든 것을 수렴하고 현실화하는 자리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신도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백성이며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은사를 간직한다고 의식하기 시작했다. 남녀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책임자 위치에 오르고, 학교와 병원, 교도소, 본당과 선교지에서 운영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교회 행정기관에서도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신학교, 신학 교육과 강의, 연구와 가르침에서도 두각을 보이고 있다.
■ 새로운 사회적 상상 
교회는 역사의 흐름 안에서 점차적으로 주변 문화의 사회적 정치적 형태를 채택하고 수용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제국의 관구 제도를 받아들여 교회를 조직했고, 원로원의 절차를 수용하고 이에 따라 325년의 제1차 니케아 세계 공의회를 진행했다. 봉건 시대에 교종은 측근 주교들에게 성직록을 수여했고, 이들은 교종에게 충성과 순종을 서약하면서 마찬가지로 관할 성직자들에게 성직록을 수여했다. 군주 시대에 교종은 로마 교황청과 추기경 등으로 이루어진 어전에서 절대 군주로 군림했다.
18세기 이후 민주주의가 전세계에 걸쳐 확산되었고, 선거와 권력 분립, 통제와 균형, 의회 제도를 통해 모든 권력이 백성들에게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존 로크나 토마스 홉스의 주장처럼 교회는 시민들의 동의나 사회 계약에 의해 설립된 것도 아니다. 앞서 알아보았듯, 시노드 또는 공의회 전통은 “1인 1투표” 원리를 표방하지는 않으면서도 운영에 대한 참여를 어느 정도 항상 보장해 왔다. 그런데 지난 200년 동안 중앙 집권화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다른 방식을 생각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새로운 “사회적 상상”이 참으로 필요한 것이다. 
찰스 테일러에 따르면, 사회적 상상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실존에 대해 상상하는 방식, 사람들이 다른 이들과 서로 조화를 이루어가는 방식, 사람들 사이에서 일이 돌아가는 방식, 통상 충족되곤 하는 기대들, 그리고 그러한 기대들의 밑바닥에 있는 심층의 규범적 개념과 이미지들이다.”15) 사회적 상상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거나 의식적으로 추종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상상은 특정 시공간 안의 사회 그룹이 자신의 관습과 공통된 태도를 이해하는 배경이다.
사회적 상상은 변화하는 시대에 더욱 쉽게 의식할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⑴ 북미의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 계획)는 오늘날 과학자들이나 일반인들에게 망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50년 전이었다면 우리들 상상에 속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사회적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 ⑵ 오늘날 대부분 국가는 흡연을 건강에 유해한 것으로 규정하여 식당, 카페, 공공 장소에서 금연 정책을 실시한다. 5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⑶ 50년 전 여성들의 신학 공부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우리들의 사회적 상상이 변한 것이다. 
교회 안에도 사회적 상상이 바뀔 수 있을까? 아직 “바로크적 사회적 상상”이 만연한 현실이다.16) 품위와 가치가 동일하지 않은 일련의 서품 직무, 위계제도에 따라 개인을 공동체에 종속시키는 관념이 우리들 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상상에서 불평등은 기능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 되고, 우주의 구조와 같아 고정불변으로 여겨진다. 근대의 전망과 대립되는 사회적 상상이다.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관한 한 모든 이의 근원적 평등을 강조하며, 사회적 차이는 다만 기능적이기에 변화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근대의 사회적 상상은 입법, 행정, 사법권의 분리를 가져왔고, 대통령을 비롯한 그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당연시한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의 불만과 좌절은 두 가지 사회적 상상 사이의 충돌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교종, 주교, 사목자, 책임자들은 사회, 정치계의 책임자들이 정의와 만민 평등의 척도로 요청받는 것을 똑같이 요청받고 있다.
현명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근대 정부의 민주주의, 의회주의 제도를 온전히 무조건 채택하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이것들 역시 역기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대 사회의 긍정적 가치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고대의 공의회나 시노드적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교회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주교 단체성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은 변화된 사회 모습을 상상해보라는 요청이다. 1965년 공의회 폐막 직전 교종 바오로 6세는 상시적 주교 시노드를 설립하여 이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주교들의 갈망을 인정한 동시에 교종의 특권도 명확히 했던 것이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시노드와 공의회는 여러 다른 모습을 취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특정 형태를 고정화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획일화된 방식에 머물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방식은 지역에 따라 상이할 수 있다.
교회 직무를 주교, 사제, 부제로 3분할하는 전통은, 로마 주교에 부여된 수위권과 함께 공동체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생겨난 역사적 발전의 산물이었고, 그 수행 방식에 변화가 있긴 했지만, 시간 안에서 지속되어 왔다. 오늘날까지 교회는 여전히 이러한 권위 형태를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요한 23세 교종 한 사람의 영감과 용기가 없었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노드 또는 공의회의 결정 과정을 개혁해야 한다고 촉구할 때, 이는 베드로 직무를 비롯한 다른 직무들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의향에 따라 시노드 전통과 이들 직무의 관계를 성찰하며 재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14-15세기 공의회주의자들은 교종직을 보호하려는 것이지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교 단체성 역시 교종의 윤리적 권위를 축소하지 않고 증진시키려고 했다.
교회일치 운동의 영역에서도 비슷한 제안을 찾아 볼 수 있다. 세계교회연합(World Council of Churches)은 최근의 문헌 “교회의 본성과 사명”에서 단체성과 공의회성에 대해 언급했다.17) “공의회성은 교회 생활의 본질적 특성으로서, 지체들의 공통된 세례에 기반 한다(1베드 2,9-10; 에페 4,11-6 참조). 성령의 인도 아래, 온 교회는 흩어져 있든 모여 있든 공의회적이다. 공의회성은 교회 생활의 모든 단계에 현존한다. 공의회성은 가장 작은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관계 안에도 이미 존재한다.”18) 문헌은 다음 사항을 진지하게 의식한다. “몇몇 사람들이나 지역 공동체, 지역 교회들이 서로 경청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리려고 할 때 집회를 소집하고 주재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이는 질서를 유지하고 진행과 식별, 동의를 얻는 과정을 진작시키기 위해서이다.” 주재자는 항상 “지역 교회의 통합성을 존중하고, 목소리 없는 이들의 발언을 북돋우고,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유지”해야 한다.19) 그렇기에, 세계적 차원에서 보편 수위권을 갖는 인물은 “다른 교회들과 그들 고유의 증언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재는 공의회성에 상반되지 않는다. 공의회가 주재의 실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주교들의 공의회성과 수위권의 관계는 교회 역사 안에서 시대마다 숙고되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 관계를 숙고하도록 초대한 것이다. 인내와 용기와 희망으로 공의회가 시작한 바를 우리가 이어가야 한다.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